粉雪、Springdale

똑바로 이어진 단지 한번 뿐인 긴 여행으로의 출발점

20241117

정말 오랜만에 쓰는 일기인 것 같다.

예전에는 제법 꾸준히 썼는데, 올해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던 해였던 것 같다. 2024년이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훌쩍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11월 중순이다.

연휴와 연말 행사 덕에 회사 일도 잠시 소강상태다. 더 이상 누적되지 않는 휴가를 소진하려 계획도 없이 목·금을 쉬었고, 가끔은 조금씩 일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올해의 연애는 배움이 있었지만 끝내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흐르진 않았다.

나는 혹시 의미 없는 무언가에 잘못된 기대를 품었던 걸까.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고, 나는 그 실망을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올해는 책도 많이 못 읽었다. 회사 이메일 외에는 글도 거의 쓰지 않았다. 가끔은 두 언어 모두 잊은 듯, 끊기는 단어들을 겨우 이으며 상대에게 내 생각을 전한다.

GPT 기반의 솔루션을 제한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소개받은 ‘뤼튼’이라는 서비스와는 거의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허망하다.

최근에는 운동을 시작했고,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산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작년부터 중요하게 생각해 온 회사 일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그렇게 또 1년을 벌었다. 1년을 2년으로 만들며, 다가올 일들에 기대도 품는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여전히 서글프다.

통일

한민족이 유엔에서 서로 영어로 비난을 주고받는 모습,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조상들 보기 부끄럽다는 말은 차마 하지 않겠지만, 남북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럴수록 주변국들만 웃는다. 일본, 러시아, 중국 모두 자국의 이익을 계산할 줄 아는 나라들이다. 그렇기에 통일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고려할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가다.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외세를 끌어들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그들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야 한다. 100년 전, 한국이 이렇게 잘살 줄 누가 알았을까?

중국은 통일을 지지하되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수 있다. 아니면 자국군의 주둔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의외로 러시아는 조용히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이 흐름은 동학농민운동 이후 청일전쟁의 전조와도 닮았다. 똑똑한 지도자라면 주한미군만 남기고 싶어 하겠지만, 이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독일의 사례처럼 가능성이 없진 않다.

이제 한국은 부유한 나라다. 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돈을 써야 한다. 1조, 2조가 아깝지 않을 만큼,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물론 자체 국방력도 계속 키워야 한다. 정치인들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전략이다.

내 고향이 늘 평안하길 바란다.

감사와 윤석열

얼마 전 감사팀의 호출을 받아 참조인으로 다녀왔다. 질문들은 예리했고, 준비가 잘 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며칠 전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회담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건, 기자들이 예전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유능한 이들도 있지만, 숫자가 늘며 허술한 이들도 많아졌다. 변호사도 곧 그럴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윤석열을 특별히 지지하진 않는다. 다만 그가 보여준 단호함에는 인상을 받았고, 그가 잘 되길 바랐다. 사실 누구든 상관없다. 박근혜 정부 때, 문재인 정부 때… 정말로 한국이 어려웠던가? 내가 본 한국은 언제나 발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부족함을 정치인 탓으로 돌릴 뿐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구절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다. 그리고 남 탓을 한다. 가까운 사람은 쉽게 욕하지 못하니, 멀리 있는 누군가를 탓한다. 사장은 못 욕해도 사장 부인은 욕하는 식이다.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회사는 결국 남의 것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 계약 관계일 뿐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내 회사는 아니다.

국가는 조금 다르다. 정치인을 욕할 순 있다. 그러나 그걸로 삶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 시간에 일 하나 더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정치인을 바꾼다고 내 월급이 두 배가 되진 않는다. 집값이 두 배로 오르지도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욕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들과 나 자신이 닮았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편법을 쓸 수 있는 자리에서, 대부분은 편법을 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본다. 그리고 언젠가 따라 하게 된다. 부모의 지위로 감형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명백히 잘못이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떳떳한가?

운동권권

내 부모보다 조금 어린 세대의 운동권들. 그들은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국가는 그걸 지키도록 정책을 짜야 한다. 독재가 존재했던 시절, 민주화를 요구했던 건 정당했다.

박정희의 유신, 노태우의 정권까지 군부독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릴 때 읽은 홍세화의 책이 떠오른다. 그의 전과도 문제였지만, 그를 탄압했던 당시의 한국은 더 큰 문제였다.

운동권은 ‘운동’은 했지만, ‘공부’는 부족했다. 사상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이 비판하던 기득권처럼 학벌을 쌓고 돌아왔다. 현지에선 밀려나 있던 그들은, 귀국 후 대등하게 싸우려 했다.

그들은 약자를 대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자를 선동해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었다. 교수, 연구원 명함을 만들고, 외국 대학의 교수들에게 교환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준교수, 부교수란 직함이 ‘교수’란 단어로 과장되기 시작했다. 포장이 공부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을 가지 못한 이들은, 그런 유학파 운동권을 더 대단하게 여긴다. 씁쓸하다.

미래

결국 누구를 욕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건 자아비판이고, 자아성찰이다.

이제 남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부터 바로 세워야겠다.

나는 언제쯤 혼자가 아니게 될까. 요즘, 너무 심심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